[리뷰] 《훵케스트라》 리뷰 - Lee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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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훵케스트라》 리뷰

2005

반이정 | 미술비평가


Hong Kyoungtack, Fuck&Roll, 2008 © Hong Kyoungtack

첫 개인전 제목을 신전(Shrine)으로 단 건 알았지만, 그가 신실한 ‘주님의 자식’인 건 이번에 알았다. 전시장에 각 잡고 나열된 파란만장한 신작을 통해선 당최 알도리가 없었고, 그에게 별 연관성 없는 질문을 던졌다가 우연히 들은 사실이다. 이 사실이 지금 이 글에서 비중을 갖을까? 홍경택의 사적 견지에서는 언제나 중요할진대, 관객 일반의 공적 견지에서는 실은 거의 무게를 싣지 못한다. 이것은 “내 그림으로 인해 감상자가 어느 정도 나의 세계에 교화(?)되기를 바라는 마음”(2000년 작가노트)이라 적은 그의 희망을 저버리는 해석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더욱이 그도 ‘교화’라는 용어가 내심 부담스러웠던지 그 뒤에 (?)를 갖다 붙였지 않나. 역설이지만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다분히 종교적인 그의 페인팅이 탈종교적 견지에서 해석 대상이 될 자격을 얻고, 나아가 감상과 평가의 높은 서열 위로 올려지는 개연성을 지니게 된다. 오늘날 생산되는 종교화가, 종교화의 르네상스였던 수세기전의 전형을 반성 없이 따라할 경우, 그것은 신념을 실어 나르는 한낱 창백한 메시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홍경택의 2005년판 매우 ‘종교적’ 페인팅은 오늘의 시점을 내면화한 덕에 보급과 감상에 성공한다. 그 원인은 홍경택이 믿는 절대자가 그의 작업 속에 괜한 군림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의 또 다른 관심사의 견제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펑키 고해성사 (告解聖事)

내가 그에 대해 모르고 있던 또 하나를 그래서 얘기할까한다. 질펀한 흑인적 선율을 대변하는 펑크(funk)와 고전음악이 실행되는 연주 단위로서의 오케스트라(orchestra)를 조합한 이번 전시 제목 《훵케스트라》가 압축해 말해주듯, 출품작 상당수가 그가 선호하는 펑키음악 계열 거장들의 얼굴과 용어를 도상 삼아 등장한다. 그렇다 그는 펑키한 음악을 좋아한단다. 화면 위에 직접적으로 언급될 만큼 홍경택에게 Kate Bush와 Prince 같은 뮤지션은 중요하다. 세상에게 보라색을 가장 소화 잘하는 80년대 팝의 퇴폐적 섹스 심벌, Prince가 여전히 건재한 뮤지션인건 알았지만, 서울의 전시장 화면 속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원색적인 선율이 치밀하게 작도된 사각 틀 속에 원색적 안료로 환원되는 변화로 그 영향이 드러난다. 홍경택의 간판이 되어버린 필기구 연작 및 책거리 연작과 금번 출품작을 잇는 일관성 중 하나가 바로 색조합의 마법사적 재능이다. 펑키 음성 코드가 원색 분해되면서 화면 안에 십자가 책형도의 예수를 4회 상하좌우로 등장시키듯이, 동일한 비중으로 Kate Bush나 Prince가 배치된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퇴폐적인 악동 뮤지션과 준엄한 신앙의 아이콘 이 동일한 격자에서 동일하게 형형색색 틀 안에 제시된다. 이름은 밋밋하지만 지저분한 세상 속의 성속화(聖俗畵)다.


탈 근대적 책거리에서, 기회균등적 성속화로

금번 신작이 취하는 일관된 유니폼은, 화면을 경직되게 네 등분한 후 정중앙에 요인을 위치시켜 그걸 구심점 삼아 조야한 원색의 옷을 뒤집어쓴 패턴들이, 사선 각도로 쏟아져 나오는, 철지난 디자인이다. 만일 인쇄된 도록으로 작품을 본다면 “이게 대체 뭐하자는 시추에이 션일까?” 싶을 법도 하다. 하나 실제 원작은 이런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부분 100호 크기 캔버스에 근 한달이 소모된 장인적 노동집약의 결과물로서, 화면 안에 실제 음악이 담기진 않으나 다분히 펑키 적이고, 그 안에 실제 종교의 서사가 회자되진 않으나 충분한 경외를 유발한다. 그걸 두고 단지 ‘페인팅의 여전한 가능성’으로 환원시키자니, 부족한 감이 있는데 더 낫은 표현을 찾질 못하겠다.

위에서 나열한 홍경택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와 나는 정반대의 인간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종교 현상에는 적지 않게 관심을 보이나 그것을 신앙으로 연결하려는 관심과 호감에는 비협조적인 나다. 또 음악적 열광에 젊은 시절을 보낸 매니아였지만, 우연히도 (트로트와!) 펑키 음악은 친해질 수 없다고 결론 내린 나다. 이 정도 되면 나처럼 반(反)홍경택적 인간이 그의 작업을 사유하는 방식이 가능할까 싶어진다. 한데 지난 9월 23일 오프닝 자리에서 나는 작품에의 경외를 탄성을 내질러 표현했다(단언하건데 나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그 이유를 좀 번거로운 이야기로 풀어볼까 한다.

탈신화화 된 지상에서 절대자가 임재할 자리는 예전만 못하다. 천상의 신의 생존은 세속의 신과 자신의 눈높이를 대등하게 맞출 때 가능하다. 지상의 모든 제도 종교는 대개 그 같은 공생(정확히는 기생)구조 안에 놓여있다. 그의 미학적 일관성은 단지 색채로 압도하는 홍경택식 책거리 그림과 필기도구의 화면빨과 편집증적 치밀성이 이번 전시에 펑키 문화로 이름을 달고 부활했다고만 보면 부족하다. 지난 책거리 그림 속에 숨겨진 종교적 아이콘이 화려한 채색 단행본들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를 내었듯, 작고한 교황과 유혹적인 동성애자의 상반신은 동일한 위상의 틀 속에서 차별 없이 수용되었다.

그림 속 교황과 예수는 네 모퉁이의 캔버스 안에서 성삼위일체를 요구할 수 없었다. 속세의 틀이 정한 성사위일체(聖四位一體)로 화면 네 꼭짓점을 오가며 P! O! P! E!(교황) 또는 I! N! R! I!(유대의 왕 나자렛 예수)로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같은 이치로 세속적 욕망도 F! U! C! K! 또는 L! O! O! K!이라 해야 했다. 바로 이 점이 작가가 구사하는 미학적 일관성이다. 만일 이번 전시를 통해 현란한 테크닉이 〈Pope(교황)〉에게 치우치거나 〈Fuck Me(해줘)〉를 소홀히 다뤘다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고 즐거움도 반감되었을 게다. 이 지저분한 세상 위에서 거래되는 성과 속의 군주들을 동일하게 위상 정립시키는 배열방식을, 홍경택이 의도한건지, 아니면 단지 형식실험 중 그의 두개의 관심사가 차례대로 그 안에 들어선 건지는 나도 모른다.


* New Power Generation(NPG)은 뮤지션, Prince 사단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홍경택 세대를 나타내기 위해 중의적으로 사용했다.

출처 | 홍경택: New Power Generation* 의 성 사위일체(聖四位一體) | 작성자 반이정

* 11월호에 들어간 원고다. 본래는 같은 아르코미술관에서 같은 날 열린 최진욱 개인전과 함께 묶을까 했지만, 그냥 단독 리뷰로 마음을 정리했다. 최진욱은 동 잡지 이대범 수석기자가 더 잘 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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